◇ 메헤랑가르 성에서 바라본 조드푸르 시내의 모습. 도시 전체가 푸른 빛으로 물들어 있다.

인도의 자이살메르에서 조드푸르로 떠나는 오후 4시 기차는 6시가 돼서야 출발했다.
인도에서는 익숙한 일이었고, 오히려 2시간밖에 연착하지 않아 감사할 만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낯선 도시에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도에서는 말이다.

기차가 모래바람을 뚫고 조드푸르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
자이살메르에서 머물던 호텔에서 예약해 준 호텔의 명함을 한 손에 꼭 쥐고 기차에서 내렸다.
한쪽에서는 포터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짐을 달라며 끌어당겼고,
다른 한쪽에서는 서로 자신들의 오토릭샤(다인승 오토바이)를 타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여기에서 평상심을 잃으면 안 된다.
낯선 여행지에서, 자정에 내린, 여자 혼자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어떤 인도 남자가 자기가 그 호텔에서 나왔다며 따라오란다.
다행이다 싶어 따라가는데 ‘가만,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알아보고 따라오라는 거지?’ 의심이 들어
호텔에 예약한 이름이 뭔지 말해 보랬더니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의심은 점점 차오르고 개찰구를 빠져나가는데 이번엔 엄청난 수의 오토릭샤 호객꾼들이 몸싸움을 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갑자기 방금까지 따라온 남자의 뺨을 누군가가 세차게 때린다.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에요.”

세상에나. 어째 예약한 이름도 모르더니! 이번엔 자기가 그 호텔에서 나왔다며 따라오란다.
예약한 이름을 대라고 했더니 역시나 모른다. 호텔 명함을 보여주며 말한다.

“당신이 예약한 것을 알아요. 전 호텔에서 나왔으니 믿어요.”

이미 한 번 속은 경험이 있어 의심이 갔지만, 다른 사람들도 사기꾼처럼 보이긴 매한가지다.
마지못해 오토릭샤에 오르는데, 혹시나 발생할 사고에 대비해 주변 길을 유심히 살폈다.

“곧바로 호텔로 가주세요” 라고 요청했지만 오토릭샤가 멈춘 곳은 다른 호텔이었다.

인도는 늘 이렇다. 오토릭샤와 호텔 간의 커미션 관계로 오토릭샤들은
자신들에게 커미션을 많이 주는 호텔로 여행자들을 데리고 간다.
여행자들에게 교통요금도 받고, 호텔에서 커미션도 받으니 일거양득으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커미션 구조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기가 호텔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

◇ 푸른색은 조드푸르에서 브라만들이 자신의 계급을 나타내기 위해 칠하기 시작했다.

속을 뻔했다. 호텔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은 거다.
화를 내며 당장 아까 말했던 호텔로 가자고 했더니 마지못해 데려다주긴 했는데 예약한 호텔도 엉망이다.
자이살메르에서는 욕실과 텔레비전이 포함된 커다란 방에 발코니가 있다더니
하나도 포함되지 않은 데다 햇볕도 들지 않는 닭장 수준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이살메르의 호텔주인과 기차역에서 만난 오토릭샤 운전사들, 그리고 이곳 호텔주인까지
모두 탐욕스러운 인도의 거짓말쟁이들 같으니라고!

(미안했지만) 옆 방 사람들이 깰 정도로 큰 목소리로 불만을 늘어놓고 씩씩대며 호텔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막상 나와 보니 깜깜한 길에는 아무도 없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여자 혼자 길을 나서다니 멍청해도 한참 멍청하다.

‘안 돼. 그렇다고 해서 비굴하게 다시 호텔로 돌아갈 수는 없어. -_-’

자존심을 세우며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두려워해선 안돼.
그리고 씩씩하게 컴컴한 길로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른다.

“잠깐만요, 내가 같이 가줄게요.”

◇ 절벽에 건설된 메헤랑가르 성의 모습. 인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이다.

제프는 독일사람이다. 비슷한 시간에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했던 커플 중 한 명인데
내가 혼자 나가는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되어서 따라나왔단다. 눈물나게 고맙다. ㅠㅠ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 걸어가니 깔끔해 보이는 호텔이 나왔다.
가격은 좀 더 비쌌지만, 아까 전 호텔과 하늘과 땅 차이다.
주인도 너무 예의바르고, 호텔방도 매우 예쁘게 꾸며져 있다.
제프는 자기도 이 호텔로 옮겨야겠다면서 여자 친구를 데리러 갔다.

방에 짐을 풀고 전망이 좋다는 옥상에 오르니 제프와 여자 친구인 바바라가 있다.
함께 맥주와 짜이(인도의 차)를 한 잔 하며
디왈리(인도의 축제) 폭죽이 곳곳에서 터지는 모습을 보니 화났던 마음이 금세 눈 녹듯 사라진다.

내일 조드푸르를 함께 돌아보기로 하고
서로 인도에서 있었던 어이없었던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제프는 말했다.

“우리가 타지마할을 보려고 아그라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야.
 오토릭샤 운전사에게 한 호텔에 가자고 했는데 그가 우리에게 뭐라고 그랬었는지 알아?
 글쎄, 타지마할이 불에 타서 그 호텔에 가봤자 타지마할이 안 보인다는 거야. 하하하. 
 인도인들의 거짓말은 기가 막힌다니까. 타지마할이 불탔다니….”

문득 아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아까 호텔 밖으로 따라나와줘서 정말 고마워. 막상 나와보니 얼마나 막막했었는지 몰라.”

“뭘 고맙긴. 넌 혼자였잖아. 여행자들끼리 도와야지.”

힘든 여행지일수록 여행자들은 똘똘 뭉쳐 서로 돕고 금세 친해진다.
이런 여행자와 함께했던 이야기야말로 여행지를 더욱 기억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여행자애(旅行者愛)다.


조드푸르(Jodhpur)


인도 북서부에 있는 라자스탄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1459년 말와르(Malwar) 왕조 출신의 라오 조다(Rao Jodha)가 건설했다. 델리와 구자라트를 연결하는 도시로 아편, 실크, 커피 등의 무역을 통해 번성했고 오늘날엔 관광지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이 도시의 또 다른 이름은 블루시티(Blue city)다. 지배계급인 브라만들이 자신의 집을 푸른색으로 칠하며 다른 계급과의 차별을 꾀했는데 이에 도시가 푸른 빛을 띠게 되었다. 유명한 볼거리로는 높이 125m의 절벽 위에 건설된 메헤랑가르 성(Meherangar Fort)과 우마이드 바완 궁전(Umaid Bhawan Palace)이 있다.

여행정보
델리까지 직항으로는 아시아나항공, 1회 경유하는 저렴한 항공으로는 일본항공이 있다. 조드푸르는 델리에서 약 11시간이 걸린다. 인도는 사전 비자가 필요하며 인도대사관의 비자 대행사에서 받을 수 있다. 6만5000원의 인지대와 8690원의 비자 수수료가 필요하다. 신청하면 다음날 받을 수 있다. 화폐는 루피(Rupee)를 쓰는데 1루피는 30원 정도다. 저렴한 호텔은 욕실을 포함한 싱글룸이 250루피, 더블룸은 350루피부터 구할 수 있다. 20∼50루피면 서민적인 식사를 할 수 있고, 짜이는 10∼20루피 한다. 깨끗하고 잘 갖추어진 음식을 먹고 싶다면 100루피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인터넷은 1시간에 20∼30루피다.

<세계일보에 올려진 글 보기>


[2007년 7월 19일부터 2009년 3월 15일까지, 세계일보의 연재를 마치며]

세계일보에서 1년 8개월간 연재했던 '박정은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 마지막회를 맞았습니다. :)

격주간 원고마감 스트레스를 감당하느라 힘들었지만,
또 이런 스트레스 때문에 글을 쓰고 길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었네요. :)

더 이상 이야기할 친구가 없어 친구를 찾아나서야할 판이었는데.. (하하)
시원섭섭한 마음입니다. :)

회원님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코너는 제 사이트의
"내 친구를 소개해"의 신문판입니다.

한국의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이렇게 신문지면으로 할 수 있어 재밌었습니다.

아무래도 '신문'이라는 매체상 딱딱한 표현과 언어를 써야해서
인터넷 글에 익숙한 저에게는 좀 힘들었었어요~

게다가 글 쓸 컨텐츠가 1년 정도 밖에 없어 1년을 계획하고 시작했었는데
1년에, 8개월을 더 썼네요~  (컨텐츠를 쥐어짜느라.... 힘들었어요. =_=)

애니웨이, 이제 마감스트레스가 사라져서 좋아요. :)

2009.3.19 pretty ch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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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리띠의 여행 플래닛, 떠나볼까
여행이 좋아 여행을 다니다보니 여행사이트를 운영하고 여행작가가 되었어요. 맛난 것도 굉.장.히 좋아해요~♥ (원고청탁 및 강연, 인터뷰는 chungeuni@naver.com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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