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열 다섯째 날의 이야기지만 첫 번째 글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이니
처음 읽으시는 분은 위에 글을 먼저 읽어주세요~ :)

"눈도 귀도 막았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조금만 마음의 문을 열어줄 수 없겠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늘도 눈을 뜨면 나 혼자 뿐일거라 생각했는데
같은 방의 독일인 언니가 짐을 싸고 있는 것이다! +.+

외롭지 않은 아침을 맞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흑. ㅠ_ㅠ

그런데, 짐을 정말 독일인스럽게 싸고 있다. ㅎㅎ
침대 위에 모든 걸 펼쳐놓고 분류한 다음, 착착착~

짐싸는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했더니
언니가 독일인들의 특별한 정리벽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 ㅎㅎ

가만....그러고 보면 나도 좀 비슷한 편인데....?
난 짐을 푸르자마자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미친 듯이 어지르고
짐을 챙길 때는 독일 사람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나. -,.-;;;;

난... 뭐지? 짬뽕인가? -,.-

독일인 언니는 영어 선생님인데 1년 휴가를 받았다고 했다.
4월 중순 자기 생일날부터 걸었는데 (앗, 나도 생일날부터 걸었는데! +.+)
슈퍼마켓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단다. (앗, 나랑 똑같다. --;)
걷는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싶어 하루에 15~20km씩만 걷는데(아,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ㅠ_ㅠ)
자긴, 동양인들처럼 중간중간에 많은 사진을 찍는단다. (정말 동양인같다. +.+)

언니가 하는 말이 정말 흥미로와서 "ineteresting~" 이라고 몇번 말했더니
자기가 아는 한국 여성이 있는데, 그녀도 항상 그렇게 말했다면서 신기해한다.
(사실은 '흥미롭다'는 말의 표현을 이거 하나밖에 몰라서 그러는 건데...--;;;;;)

르 퓌에서부터 걸었는데 그쪽 길은 정말 너무 험난해서(정말 아름다왔지만!) 
피레네를 넘을 땐 너무 쉬웠단다. (아...정말이지 난 산은 더 이상 못 넘겠다. ㅠ_ㅠ)

"난 1년 동안 받은 휴가를 열심히 즐기고 있어.
하지만, 하루에 30~40km를 걸어서야
어떻게 진정으로 길을 즐길 수 있겠어?"

언니의 말이 맞다.
하루에 30~40km씩 걸으면 15~20km씩 걷는 것 보다 온전히 길을 즐길 수 없다.
꼭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놓치는 것을 자전거를 타면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하루에 15~20km씩 걷는 언니보다 왜 내 발걸음은 더 느린거지...? -_-;;;

그래서 언니와 헤어지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름도 못 물어보고...
이메일 주소라도 물어볼 껄 하는 후회가 든다.

정말 나랑 코드가 맞는 언니었는데...

[위의 사진] 앞서 걸어가는 독일 언니의 모습

달리던 롤란드
한동안 걷는데 갑자기 뒤에서 다다다다 소리가 나더니 누가 휙~ 지나간다.

앗, 롤란드다. +.+ (아소프라에서 처음 만난 친구다.)

"올라~ 롤란드!"

달리던 롤란드를 불러세웠다.

"올라, 굿모닝, 아니따~"
"넌 왜 달리고 있는 거야?"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
"오늘은 Full of Energy야. 그래서 달리고 있는거야."

아하하하하. 역시, 신기한 친구. ㅋㅋ
에너지가 넘쳐 흐르면 물집잡힌 발로도 순례자의 길을 달릴 수 있는 거구나..-_-;
(롤란드는 발에 적당한? 사이즈의 물집이 잡혀 있었다. )

"그래, 그럼 계속 달려~* +.+"
"아스딸라 루에고(다음에 봐), 부엔까미노(잘 걸어), 아디오스(안녕),  굿바이 아니따"
(정말 롤란드는 이렇게 말했다. -_-; 뭐 항상 이렇게 말했지만...)

[위의 사진] 다시 달려가는 롤란드, 항상 한 손에는 1.5l 물을 들고 있다. 

 잠시 뒤에 마을이 나타났다.

고양이 두 마리가 대화하는 것 같아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 쪽에서 음매에~ 소리가 나서 보니 염소였다.

아저씨가 날 보더니 [왼쪽 사진] 의 염소는
방금 태어난 거라며 알려주신다.  

와.. 방금 태어난 염소..+.+

방금 태어난 생명을 봤으니
오늘은 행운이 가득할 거라고 아저씨가 말했다.

행운이라....흠.
가만보니 옛날 중국여행에서도 양인지 염소인지가 태어난 걸 봤었는데 그날, 행운은커녕 대판 싸웠던 기억이 났다.

행운은 무슨...-_-;;;;


사막의 시작

[위의 사진]처럼 끝없이 펼쳐지는 밀밭이 시작되었다.

어린왕자 책에서나 또는 그냥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길이
"와~ 금빛으로 빛나는 밀밭이다~ 이렇게 광활한 평지에 펼쳐진 밀밭은 정말 이국적인걸~ +.+"
하겠지만...

순례자들에게 이런 길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ㅠ_ㅠ

그늘 한 점, 물 한방울 없는 밀밭 길은 사막과 같다.

이런, 이전 마을에서 물을 받지 못했는데...ㅠ_ㅠ
4.5km 뒤에 Sambol이라는 마을이 있다고 해서 안심했다가
식수대가 없어 지나쳤는데 그냥 알베르게에 들러 물이라도 받을 껄. ㅠ_ㅠ

"이러단 죽어버리고 말겠어. ㅠ_ㅠ"

바삭바삭 말라가는 밀처럼 나도 황금빛으로 누렇게 떠서 죽을 것 같았다.

[위의 사진] 식수대가 나타나라고 기원하며 돌 하나를 올려 놓았다. ㅠ_ㅠ

가방 무겁다고 물통 큰 거 안들고 다니고,
식수대 외에 물 받기를 부끄러워하고,
얇은 안내서조차 없이 순례자 협회에서 준 종이 달랑 두장만 들고 다니면
가끔가다 이렇게 큰 난관에 봉착한다. (언제나 물 문제. ㅠ_ㅠ)

그날, 500ml도 안되는 물로 6.5km를 걸었다. -_-;

순례자의 길을 걸은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테다.
나도 나의 생존력에 놀라 자빠질 뻔 했으니.... -_-

인간의 목숨은 참으로 끈질기다.

[위의 사진]이 표지판을 보고 얼마나 기뻣는지 아무도 모를꺼야. ㅠ_ㅠ

[위의 사진] 드디어 마을이 보인다. ㅠ_ㅠ
항상 마을에서 첫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장 높은 교회의 첨탑이다.
앞에서 날 추월하며 걷던 분, 하나도 목 안말라 보였다. ㅠ_ㅠ

[위의 사진]  사막의 오아시스에 도착한 느낌은 바로 이런 걸꺼야.
마을이 가까이 오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ㅠ_ㅠ

열 다섯 번째 날, 온타나스(Hontanas) 21km

 7시 25분 출발, 1시 30분 도착. 5시간 30분 소요.
이렇게 조금밖에 안 걸었는데
이렇게 힘들긴 처음이다. ㅠ_ㅠ

다 물 때문이야. ㅠ_ㅠ
정말이지 밀밭에서 객사할 뻔 했다.
다음부터는 꼭 물을 열심히 챙겨야지. ㅠ_ㅠ

[왼쪽 사진]은 Albergue Municipal, 5유로
시설은 괜찮았고, 사람이 많이 없어서 좋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언니인 기세라와
요즘 들어 자주 만나는 실야를 또 만났다. :)

아참, 그리고 앞으로 종종 나올 스페인 친구,
나초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

나초는 경찰인데 스포츠로
순례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했다.

도착하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샤워를 하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하게 정신이 돌아왔다. 정말 신기하다. --;

빨래를 널러 밖에 나왔더니 재미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위의 사진] 왼쪽은 스페인 할머니, 오른쪽은 이탈리아 할머니.

스페인 할머니는 그늘에서, 이탈리아 할머니는 선탠을 하려고 햇볕에서 의자에 앉아
각자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즉,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로.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는 꽤나 비슷한데 그래서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이 두 나라의 말을 각자 사용해도 의사소통이 어느정도 가능하다.

아마도 한국인과 조선족의 느낌이 아닐까 싶은데
그래도 우리는 같은 언어지만 이쪽은 다르지 않는가!

정말 신기했다. :)

나중에 이탈리아에 갔을 때 아무도 영어를 못 알아듣길래
이날 할머니들이 서로 의사소통 했던게 기억이 나 스페인어로 말했더니
이탈리아 사람이 정말 알아들었다는...-.-;;; (나는 못 알아들었지만...-_-)
신기했던 건 이탈리아 사람이 외국어를 집중해서 듣고 있다는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너무 자연스럽게 듣고 그냥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어로 대답해서 너무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위의 사진] 이날 먹었던 저녁, 전식과 후식만 있고 본식 사진이 없다..--;; 오늘의 메뉴 8유로

이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작은 마을의 작은 식당에
쿠바에서 온 언니가 일하고 있었다.

세상은 참 넓고도 좁았고,
난 죽을뻔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있었다.

2008. 3. 28(2010.3.9 업데이트) pretty chung..:-)

다음 글 읽기 ☞ [순례자의 길18] 열여섯째 날, 어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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